몸이 기억하는 동안 마음은 기록한다 /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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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생활 에세이]는 작가가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동네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동네에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동네와 새롭게 관계 맺기를 기대합니다.



몸이 기억하는 동안 마음은 기록한다

오은 시인

내가 기억하는 이사의 횟수는 총 여섯 번이다. 어릴 적 한 번의 이사를 더 경험했다고는 하나 연년생 형은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데 반해 나에게는 뿌옇기만 하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읍에서 전주로 떠난 것이 첫 번째 이사 기억이다.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 쾌재를 부르던 나는 이내 우울해지고 말았다. 방과 후부터 해질녘까지 함께 놀던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슬펐다. 매일 걷던 길을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상했다. 머릿속에 길이 구불구불 펼쳐지더니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산책이 내 취미로 자리 잡은 것은.

✱ 어린 시절 형과 나


골목골목을 누비며 발견하던 아기자기한 기쁨이 전주에도 있을까? 낯선 풍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사 전날, 이삿짐을 싼 뒤 혼자서 동네를 걸었다. 집 옆에는 극장이 있었는데, 개봉 영화의 한 장면으로 간판을 그리던 화가 선생님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그가 해주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간다고 영영 가는 건 아니야. 다 돌고 도는 거야.”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자주 가던 분식집에 들러 인사를 할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전주에도 떡볶이 파는 데 있어. 걱정 말고 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몸으로 실감하며 집에 돌아왔다.

이사 후에는 새 동네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 주위에는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논길을 따라 걷고 있으면 도시가 아닌 것 같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논길이 아스팔트길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위에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산책로를 잃은 나는 또다시 절망했다. 이사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사는 사는 곳을 옮기는 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 풍경이 통째로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걷는 감각으로 풍경을 새기는 나로서는 동네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왔다. 고시촌의 반지하 방에서도 살아보고 오피스텔에 거주한 적도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동네 이름이 달라졌다. 서울은 컸지만, 살 곳을 찾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많이 걸었다. 살던 곳도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어 현관문을 열 때는 헉헉거리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이 탄탄대로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동네 시장 구경은 횡단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제철과일부터 시작해 형형색색의 나물, 은빛 물결을 이루는 생선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시장 사람들의 구성진 대화를 들을 때면 귀가 번쩍 뜨였다. 그때 내 소원은 딱 하나였다. 자그마하더라도 주방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

직장에 입사할 때쯤 또 한 번 이사했다. 교통이 편리한 동네라고 했는데, 이사한 집에 주방이 있다는 게 더욱 좋았다.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네에는 초등학교가 있어서 산책할 때마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직장에서 어른의 언어를 사용하다 아이들의 입말이 들려올 때면 귀담아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말하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바로 투명하게 말하는 일이었다. 좋은 걸 좋다고 흔쾌히 말하기, 즐거울 땐 즐겁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기. 돌려 말할 때조차 말끝을 흐리고 마는 어른들과는 다른 말하기였다. 아이들이 무심히 던진 단어에서 자극을 받고 돌아온 날이면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했다. 그 메모가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다.

지금 사는 곳 근처에는 숲이 있다. 천도 흐른다. 동네에 초록이 무성하다는 게, 물소리가 들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매일 깨닫는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걸었고, 걷는 습관은 내 시야를 넓혀주면서 동시에 보잘것없는 것에 애정을 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어떤 동네에 살든, 그 동네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걷는 일은 사는 동네를 내 안에 스며들게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동안, 마음은 부단히 기록하고 있었다. 발끝으로 길을 두드릴 때면 동네와 교감하는 기분마저 든다.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만 풍경은 비밀을 선사한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다음 두 가지를 마음에 단단히 새긴다. 동네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별 볼 일 없다고 단정하지 않기. 동네는 한결같아서 좋고 늘 조금씩 달라 보여서 더 좋다.

✱ 양재천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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