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고을시장에서 정읍의 소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서인석 악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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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는 오랜 시간이 쌓인 장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샘고을시장은 1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시장인데요. 옛날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정읍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히 자리잡은 곳이지요. 입구를 지나 시장 깊숙이 들어가면 과일 등의 음식은 물론 생활에서 쓰이는 잡화 등의 물건도 여럿 보입니다. 삐뚤빼뚤 다정다감한 손글씨로 ‘부루베리’ 라고 적힌 글자를 보면 괜히 웃음이 나기도 해요.


이렇게 시장 내부의 여러 가게들 사이로 장구와 북이 놓인 오래된 악기점 ‘전승명가'가 보입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 북) 서인석 명인의 악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손수 만든 악기들. 그 안에 담긴 건 장인의 손길로 빚은 소리만이 아닙니다. 악기 안에 간직하려는 정읍농악의 숨결, 그간의 전통과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마음 또한 담겨 있습니다. 북과 장구 안에 깊은 소리를 길어올린 악기장. 그의 말과 손이 담아낸 정읍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농악이 시작된 곳 정읍



“정읍은 농업도시이면서 농악의 발원지이기도 해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장고와 북을 만드는 악기장 서인석이라고 합니다. 악기장은 한국의 전통악기를 만드는 기능자인데, 저는 연주도 할 줄 알아서 기능과 예능을 함께 해왔습니다. 여덟살 무렵 할아버지에게 악기 만드는 법을 배운 게 제 일의 시작이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여기에 지금의 저와 제 아들들까지 하면 악기 제작기술을 4대째 이어가는 중이지요.


Q. 우연히 KTX 정읍역의 벽면을 본 적 있어요. 논밭을 배경으로 타악기를 치며 풍물놀이 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죠. 그런 그림이 왜 붙어 있는지 궁금했는데, 정읍이 농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곳임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한국의 전통음악 역사를 살펴보면 궁중에서 쓰이던 제례악에서 민중과 어울릴 수 있는 민속음악이 나와요. 그중 하나로 분류되는 게 농악인데, 정읍은 농업도시이면서 농악의 발원지이기도 해요.


Q. 정읍에 얽힌 옛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중요한 역사가 여럿 나오네요. 한 예로 어릴적 정읍살이 경험을 만화로 그린 선우훈 작가님의 또 다른 작품에서, 정읍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지로 등장하거든요. 국악 분야에서도 정읍이 주요 무대인 게 신기해요. 정읍에 얽힌 국악 이야기에 어떤 게 있는지, 농악이 정읍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녹아 있었는지 그런 부분도 궁금해집니다.

정읍에는 백학동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내장산 자락에서 정읍의 지형을 내려보면 학이 알을 품는 모습이라 지어진 이름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의 종교세력들이 동학에 합류하며 농민운동이 시작되요. 여기에서 농악이 농민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그냥 모이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모일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죠. 그 판에서 기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 찾아와 놀이를 하고 악기를 연주했는데 그게 농악이었어요. 농악을 들으려 정읍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정읍의 농악과 함께 해온 집안



“할아버님 때부터 아버지, 저까지 전통적 악기제작 기법을 지켜왔어요.”


Q. 그 시대의 농악에서 악기장님의 집안과 연결되는 이야기도 있을까요? 할아버님 때부터 악기장님까지 3대째 악기 만드는 기술을 이어오고 계시잖아요. 정읍에서 펼쳐진 농악의 역사에 대해 악기장님 집안을 빼고 말할 수 없을 듯 해요.

농민운동을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제 할아버님 세대인 분들이었지요. 한 예로 당시 정읍의 장인들은 장구를 만들 때 “이 통은 좀 컸으면 좋겠다” 라거나 “통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연주에 필요한 부분을 파악해가며 악기를 만들 줄 알았어요. 요즘 악기 제작을 배워간 사람들을 보면 만들 줄은 알아도 연주까지는 안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러다 보니 연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원하는 소리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그 소리가 나는지 몰라요. 이런 부분까지 감안할 수 있는 전통적 악기제작 기법을 지켜온 게, 할아버님 때부터 아버님을 거쳐 저까지 이어진 저희 집안 사람들이죠.

 

Q. 말씀하신 내용에서 악기 제작방식을 지켜온 데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져요. 얘기가 나온 김에 장구 만드는 법에 대해 들려주세요.

먼저 궁글채나 열채(장구의 북판 부분을 치는 막대)로 칠 때 소리가 나는 북판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볼께요. 예전에는 북판을 사냥한 동물가죽으로 만들었어요. 죽은 동물의 일부로 물건을 만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제사의식과 연결되기도 했지요. 지금은 동물보호 차원에서 가죽을 벗겨 쓰지 말자는 의견이 있어 이에 대한 대체재료를 쓰기도 합니다.

장구의 몸통 부분을 놓고 보면, 고려시대 때 일상생활에서 쓰던 청자로 장구 몸통을 만들던 시기가 있어요. 그때에는 장구의 몸통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갈수록 부분 부분 끊어 만들게 되지요. 저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장구 몸통을 하나로 이어 만드는, 이른바 통장구 제작기법이 적용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정립한 제작기법을 배우기 위해 대전이나 대구 등 전국 곳곳의 기술자들이 정읍으로 찾아왔고요. 그렇게 장구의 제작방식이 정읍에서 전국으로 퍼졌지요.


Q. 이곳 악기점 내부에 장구와 북이 여럿 보여요. 대부분 직접 손으로 만든 악기 같아요. 수제 장구는 단번에 만들지 않고 꽤 오랜 세월 숙성기간을 거쳐야 한다면서요. 

오동나무를 베어 장구 몸통용으로 다듬어요. 다듬을 때 바로 완성 상태까지 깎아내는 게 아니라 1년, 2년, 3년, 이런 식으로 해를 거듭해 숙성시키며 나무를 깎아가요. 손으로 만들 경우 제일 빠르게 깎는 게 5년, 심지어는 20년 가까이 걸려 숙성시키며 깎아내기도 하죠. 이런 건 수제 작업의 경우이고 보급형 장구를 만들 때는 선반기계로 생산해 교육기관에 납품합니다.



정읍에서 지켜온 농악의 과거와 미래



“이곳에서 나오는 소리는 저의 삶 그 자체에요.”


Q. 악기를 만들어 외부에 내보내시기도 하지만, 샘고을 시장에 자리잡은 이 악기점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겠어요. 악기장님이 이 공간을 운영하는 동안 어떤 분들이 찾아왔나요?

19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까지 정읍의 장구가 널리 퍼지는 가운데, 전국 대학가의 사람들이 하계와 동계 기간 동안 장구연주를 배우러 찾아왔어요. 2000년대에서 최근인 2020년대에는, 정읍에서 장구 장단을 배워간 사람들이 그걸 자기 지역에 맞게 특성화를 시켰어요.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전문적인 매니아로 있으면서 서로 교류하고 있고, 이제는 자신에게 맞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갖고 싶어하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훨씬 더 개인화되고 세밀해지면서 개성이 뚜렷해졌죠.


Q. 샘고을시장에 자리잡은 이 작은 악기점을 통해 장구 제작방법의 보급, 시대에 맞는 제작방식, 장구연주에 대한 보급 등 여러 흐름이 있어온 거네요. 이제는 아드님들도 악기 만드는 기술을 계승해나가고 계시고요. 이 악기점 안에 켜켜히 쌓인 시간의 힘이 느껴지는 듯해요.

정읍은 문화예술의 도시에요. 농악의 음률이 그대로 살아 있죠. 때문에 정읍에 오면 무조건 우리의 전통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정착돼 있어요. 정읍 문화예술의 극치가 이런 재래시장 터에 자리를 잡은 거죠. 악기점이 자리잡은 샘고을 시장은 15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장구와 북을 만들어 왔어요. 이곳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저의 삶 그 자체에요.


Q. 샘고을시장에서 자리를 지키며 이제껏 살아온 악기장님의 삶, 그 삶의 무대가 된 이곳 정읍이라는 지역의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정읍에서의 삶을 이어가려는 악기장님의 고민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정읍에 찾아와 악기에 대한 배움을 갖고 자기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 배움을 ‘갖고 가려고만' 하지 말고 정읍으로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지금의 정읍에 존속하는 문화 예술성을 이곳에 사는 우리가 지켜내야 하잖아요. 사는 지역의 문화유산이 이렇게 우뚝 서 있는데 그것에 집중하지 않고 외부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런 정서를 어떻게 하면 다시 안으로 돌릴 수 있을지, 그런 시도를 한다면 목표를 이루는 데 10년이 걸릴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Q. 악기장님의 과업을 이은 다음 세대가 어떻게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가면 좋을까요?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강의를 하는 것보다, 국악 보존과 관련해 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잡겠다고 생각해요. 국악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만들고 싶은 게 제 신념이에요. 악기 제작기능과 예능을 겸비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장을 만들고 싶어요. 내가 이 일을 시작하면 이 일들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겠지요. 그 과정에서 계속 뭔가를 해내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409-1

이용시간 : 09:00 - 18:00 첫째 셋째 일요일 휴무

전화 : 063-532-8944



글 | 이상미 에디터

사진 | 백서희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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